분노하라 – 스테판 에셀 지음

분노하라 – 스테판 에셀 지음

분노하라 – 스테판 에셀 지음
요즘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단어가 무엇일까? 바로 ‘분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원래 ‘분개’가 더 비슷한 뜻의 번역이지만 강한 메시지를 위해 ‘분노’로 번역했다고 한다.

분개가 무엇일까? 분노할 것에 분노하는것이 바로 분개가 아닐까 싶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다른 것을 틀리다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틀린 것을 다르다고 그냥 넘어가는 것도 문제라고 한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할 줄 아는 자세. 문제를 지적하지만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서 회피하지 않는 자세가 우리에겐 절실하다.

이 책은 기대했던 것 보다 상당히 얇았고, 그 얇은 분량 중에서도 스테판 에셀의 글은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한 40페이지가 되지 않는 분량. 그 뒤로는 인터뷰와 조국의 추천사, 그리고 옮긴이의 말이 채우고 있다. 하지만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고, 그의 삶으로 증명하는 그 말들이 주는 울림이 결코 적지만은 않았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이 이러한 원칙과 가치들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 같이 지켜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 <분노하라> 10p 中, 스테판 에셀, 돌베개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 레지스탕스는 이 사실을 알고 강력히 요구했으며 ‘언론의 자유, 언론의 명예, 그리고 국가, 금권, 외세로부터 언론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지스탕스에 이어 1944년부터 각계각층이 언론에 대해 줄곧 주장해온 바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언론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 <분노라하> 12p 中, 스테판 에셀,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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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발췌하다 보면 어느 하나 소개 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 없다. 문장의 약간 부분만 변경한다면 우리나라의 상황에 적용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아니 적용되지 않는 부분이 없다고 해야 맞겠다. 어떤 청년들은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없는 것이 쿨해 보이고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남을 외면하는 사회, 자신만 생각하는 사회, 경쟁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지금 어떤 결과들을 가져 오고 있는 지는 명확하게 보여지고 있기때문이다.

아직도 정부와 언론은 국민을 개돼지로 보고, 연예인 아랫도리 기사에만 열광하는 줄 안다면 오산이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진짜 그렇게 취급당해도 마땅한 족속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개돼지라서 먹을 것만 먹여주면 불만이 없다고 했다는데, 그 기본적인 먹고 살 것이 걱정되는 사회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운이 좋아서 그렇지 언제 어디서라도 사고가 날 수 밖에 없는 사회, 누군가 사고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사회안정망이 망가진 국가는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인권 선언에 영어권 국가의 대표들이 제안한 ‘국제적’이라는 말 대신 ‘보편적’이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르네 카생 덕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이 당시에는, 인류를 겁박하던 전체주의의 위협에서 해방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 위협에서 해방되려면 유엔 회원국들로부터 이 선언에 나오는 보편적 권리들을 존중하겠다는 서약을 받아내야 했다. 한 국가가 자국 영토에서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하면서도 버젓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강변을 깨부수는 하나의 방법이 바로 이 인권 선언이었던 것이다. ‘내 나라 안에서는 내가 주인이니 마음대로 대량 학살을 자행해도 된다’고 생각한 히틀러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 <분노하라> 24p 中, 스테판 에셀, 돌베개

독재자와 독재자의 딸이 독재를 하는 지금 현실에서 우리는 좀 더 ‘보편적’가치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 자기 지역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이기심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이고 ‘평화적’인 생각을 가지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연대는 없고, 개인만, 지역이기주의만 남아 갈가리 찢어져 상처만 남을 뿐이다. 

이런 경우 우리가 해야 하는 질문은 여러가지가 있겟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적당한 질문은 ‘과연 누가 이득을 보는가?’라는 것이다. 이득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않는 자들, 엄청난 방산비리를 여태 보아 왔던 우리는 당연히 이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분열하기 보다는 그 주체에게 분노해야 한다. 요즘 이슈가 되는 한 가지의 예로 들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기성세대들은 청년들을 탓하거나 모든 핑계를 그들에게 대는 것을 멈추고, 그들이 불만을 토로할 수 있도록, 그들이 문제를 제기해도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분위기의 사회를 만들어 주도록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회의 구조와 문제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 정의로운 사람이 고초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놓고, 문제의 핵심에 다가서려는 사람을 시끄럽고 말 많은 존재로 간주하면서 누군가를 욕할 자격은 없는 것 같다.

작가가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이렇게 메시지를 던지는데, 고작 40세가 조금 넘은 나이로 나이탓을 하며 사회를 관망하고 관조하는 자세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비겁하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범사회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직장 같은 작은 사회에서라도 후배들에게 권위로 누르며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는 것에 대해 묵인하고 모른척하며, 둔감해지고 결국 동조하지 않는 작은 걸음부터 시작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