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 홍세화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 홍세화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문화비평 에세이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진보해갈 것인가? 이 책은 그런 고민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걱정하듯이 누군가는 너무 프랑스를 높이고 우리나라를 낮춘다고 생각하며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진국병에 걸린듯한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을 보면 왜 이렇게 좋은 정책들과 생각들은 선진국을 따라 하지 않는지 의문스럽다.

이 책이 국내에서 출판된 시기는 1999년이다. 그 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과거의 이야기 같지 않은 것은 분명 우리의 정치 현실이 그 당시로부터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읽는 내내 뜨끔하고 읽는 내내 부러웠다. 그래도 책을 좀 읽었다고 전혀 생소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좀 더 깊이 사회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경제성장을 외치고, 사회적 진보를 원한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구체적으로 고민해 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나, 저급하고 비열한 사회적 동물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파하는 것’은 결코 한국인의 특성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 안에 살면서 자기보다 못한 인간이 있기를 기대한다. 자기는 중심에 있기를 기대하고 다른 사람은 주변에 있기를 기대한다. 자기가 주변에 있어도 더 주변에 있는 사람이 있기를 기대한다. 부자는 왜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만 부자를 느끼는 것이다. 소수 외국인을 차별하고 멸시하고 내쫓을 때 내국인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편하고, 차별받는 지역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즐겁다. 이런 저열한 인간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똘레랑스 이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다. 정치가, 종교인, 교육자, 언론인, 학자들의 임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확인하여 사회적 불평등과 모순이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싸워야 하는 것이다.

-46p,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한겨레 신문사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 홍세화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 홍세화 문화비평 에세이

지금 한국의 언론지형은 그 당시 보다 훨씬 더 기울어져 있기에 이 문장들이 더 아프게 와 닿는다. 약자들의 편에 서기 보다 강자들의 앞에 서서 약자들을 짓밟는 게 훨씬 쉬운 일이겠지. 하지만 크게 그렇게 보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이렇게 스스로 차별받음에 대항하지 못하고 나서서 자신 보다 약자들에게 차별하는 비겁한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강자에게 대항하지 못하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한다면, 강자에겐 아부하고 약자에겐 잔혹한 이들을 비겁자라 부른다. 우린 비록 겁쟁이에서 벗어나지는 못할지언정 스스로 비겁자가 돼서는 안되겠다.

우선 교원정년 단축계획이 그들을 분노케 했다. 나는 그 내용을 듣고 2년 전에 있었던 프랑스 트럭운전사들의 파업을 돌이켜 생각했다. 당시 파업에 돌입했던 트럭운전사들의 요구 중에는 60세로 되어 있는 정년을 55세로 단축해줄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의 교원들과 정반대의 요구를 했던 셈이다. 물론 퇴직 후 연금제가 아직 허약한 한국과 달리 프랑스의 연금제는 탄탄한 편이다. 그러나 또 하나 다른 점이 있다. 프랑스의 트럭 운전사들에게 ‘세대간의 연대’가 있지만, 한국에는 아직 그 개념조차 없다는 것이다. 파업에 참여했던 한 트럭운전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58살이다. 트럭운전은 실로 고되고 어려운 직업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해왔다. 나는 60살까지 일하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60살 너머까지 일하고도 싶다. 그러나 실업자가 되어 고통받고 있는 자식들을 보면서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넘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4~175p,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한겨레 신문사

작년 우리 회사에서는 임단협을 추진할 때 그 해 정년퇴임자들의 정년을 늘릴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후배들의 임금 삭감과 희망퇴직, 즉 고용불안이었다. 결국 조합과 회사는 그 안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 정년자들이 퇴직하는 순간까지 깽판 아닌 깽판을 쳤었다. 그리고 그게 원인은 아니었지만 우리 회사의 일부 공정에 비정규직이 들어오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 사람들의 섭섭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해고가 아닌 원래 정년퇴직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을 연장하기 위해 후배들의 고용불안을 가져오게 된다면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 그럴 줄 몰랐어도 좀 가만히 계셨다면 좋았을 것 같다. 이분들은 결국 후배들에게 따뜻한 환송도 못 받고 뒤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퇴직했어야 했다.

조합이 제대로 못 해서 자신들이 짤리는 거라고 술자리에서 큰 소리 치는 그들을 보며, “이 사람들아! 후배들은 그 나이까지 이 직장을 다닐 수 있을지도 모르네. 정년이 흔들리고 비정규직이 들어오는 마당에 10명도 안되는 당신들을 위해 지금 있는 몇 백 명의 고용불안과 앞으로 들어올 후배들의 미래까지 저당잡혔어야 했는가?”라고 한 소리 해 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심정을 모르겠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행동과 나가는 순간까지의 안하무인의 모습은 아쉬웠다. 본인들의 처지도 안됐지만 그 사이 희망퇴직자를 모집하고 비정규직이 들어와서 눈보라를 맞으며 싸우고 있는 후배들의 모습을 보고 ‘힘내라’고 응원해주기는커녕 ‘쌤통’이라는 듯 말하며 떠나는 모습에선 이 책에서 말하는 ‘세대간의 연대’가 필요해 보였다.

개인적인 일화였지만 지금 사회에서도 앞 세대가 차지하고 놓지 않아 뒤 세대가 진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난 대선에서는 급기야 ‘세대간의 갈등’으로 심화되기도 했었는데 우리는 같은 노동자끼리, 혹은 서민들끼리라도 서로 후배들에게 무엇이라도 나눔을 실천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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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제 막 사회안전망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이엠에프 이후 실업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사방에서 절망과 고통의 소리가 나온 뒤에 겨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자본가측은 아이엠에프 이전까지는 고임금 때문에 국가경쟁력이 떨어져 경제성장에 지장을 준다고 주장해왔다. 아이엠에프로 임금이 엄청나게 깎였고 실업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이므로 앞으로 당분간은 고임금 탓으로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소리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 대신에 사회안전망이 구축되기도 전에 미리 봉쇄하려고 노력할 것이 틀림없다. 과거에는 고임금을 주로 탓했는데 앞으로는 사회복지비용 부담에 화살을 돌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리하여 가난과 불행을 각 개인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려는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더욱 편승할 것이다.

-270~271p,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한겨레 신문사

보편적 복지에 대해서 새누리당에서 말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고 봐야겠다. 1999년에 이미 이렇게 많은 예언을 했지만 그 당시에는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었고 ‘국민의 정부’시절이었기에 이렇게까지만 봤었던 것 같다. 2015년 지금 우리 사회는 사회안전망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고, 자본가들은 ‘귀족노조’라는 이름으로 정규직들의 과도한 대우가 비정규직의 어려움을 낳는다는 새로운 이론을 들고 나왔다. 현실은 작가가 생각했던 것보다 급속도로 나빠졌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개선시키기보다는 더욱 악화시켜 가난한 사람들을 사회에서 추방하고 주변화시키는 현실, 정리해고로 쫓겨난 실업자들의 책임을 그들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는 일, 힘없는 여성노동자들을 우선적으로 해고시키는 일, 반대자를 여차하면 감옥에 집어넣는 일,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모른 체하는 일, 억울한 죽음들의 억울한 사연을 밝혀 그 원혼을 달래주지 않고 모른 체하는 일……. 이런 일들이 한국의 사회적 왕따의 구체적 모습들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까지 왕따시키고 있는 사회에 어떤 왕따 현상이라고 나오지 않겠는가?

-48p,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한겨레 신문사

전에도 몇 번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어려움에 당한 사람들이 항상 먼저 하는 이야기가 “당해 보니 알겠다.”라는 것이다. 그동안 언론만 믿고 그들의 장단에 맞춰 손가락질에 동참했었는데 막상 당해보니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억울해 미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야속해하며 사회의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또 손가락질하더라.

자업자득이라고 말하고도 싶다. 하지만 우리도 그들을 또 모른척하면 그들과 다를 게 무엇일까 싶다. 누군가는 먼저 관심을 가지고 도움의 눈길을,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들의 세상에 왕따 문화가 나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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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에 역사성이 담겨 있고 없고의 차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예컨대 몇 년 전에 김영삼 대통령이 한국통신 노동자들의 활동을 가리켜 ‘국가전복기도’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프랑스였다면 그야말로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공화국의 대통령은 “짐이 곧 국가다”라고 했던 루이 14세가 아니다. 프랑스에서 국가는 전복되는 게 아니다. 체제가 바뀌고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뿐이다. 국민이 그것을 바라면 그렇게 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되어왔다. 공화국이란 게 다른 게 아니라 바로 그런 것이다. 한국도 헌법 제1조에 밝혔듯이 공화국인데 그것도 민주공화국이다.

-56p,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한겨레 신문사

대통령에게 ‘석고대죄’를 해야 한다고 큰소리치던 국회의원들의 모습이 이 문장을 읽으며 떠올랐다. 씁쓸했다.

부역자들이 없었을 리가 없다. 아주 많았다. 특히 극우청년들로 구성된 민병대는 레지스탕스의 정반대편에 있었던 무장 그룹이었다. 그들은 레지스탕스 소탕작전에 앞장서기도 했는데 그들 중에는 독일의 게슈타포보다도 더 악독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부역자들을 프랑스에서는 ‘콜라보’라고 일컫는데, 콜라보라는 말은 지금도 프랑스 말에서 가장 추악한 말 중의 하나다.

나치가 패망하자마자, 바로 ‘콜라보’ 청소작업이 벌어졌다. 처형된 사람만 7만 명에 이르러, 점령되었던 기간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그 중에는 처형까지 당하기에는 억울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런 정도로 콜라보를 처리하는 데는 똘레랑스를 눈곱만큼도 볼 수 없었다. 특히 말과 글로 콜라보 행위를 했던 이른바 지식인들에겐 그야말로 한치의 틈이 없었다. 그들은 콜라보 경찰이나 민병대들보다 더 엄중하게 처리되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에스프리(정신)’를 죽이는 행위가 가장 큰 죄라는 것이다. 심부름꾼들의 배반 행위는 그것으로 끝나지만, 에스프리가 죽으면 세대가 죽고, 역사가 뒤틀린다고 했다. 남의 구조물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에스프리였다. 정신이었다.

-68~69p,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한겨레 신문사

흔히들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 ‘콜라보’ 청소작업에서 찾는다. 우리나라에선 친일파를 척결하기는커녕 친일파에게 독립운동가들이 청산되었다. 제대로 된 승리의 역사, 경험이 없는 민초들에게는 두려움만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역사를 뒤집으려고 하고, 권력에 빌붙어 거짓을 떠들어 대는 언론들을 보면 용서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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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지금 아주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진정 올바른 고통분담을 실행하여 온건한 사회로 갈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와 같이 고통전담을 계속 강요하여 더욱더 불안한 사회,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된 사회, 그리하여 고통과 절망이 깊어지는 사회로 갈 것인지의 중대한 갈림길에 있는 것이다.

-271p,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음, 한겨레 신문사

다소 제목이 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는 고민하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준다. “제2부 프랑스 사람들 이야기”와 “제3부 한국 사회와 프랑스 사회의 만남”의 일부분은 좀 넋두리 비슷한 사족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프랑스 사회에 빗대어 우리 사회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작가의 생각을 풀어 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면 항상 지금 사회와 지금 정부에 대해서 비판적으로만 생각했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있었다고 하더라고 마냥 두루뭉술했었지 이렇게 세밀하게 다른 사회와 비교하면서 우리의 문제점을 집어 본 적이 없었다.

오랜만에 발췌한 부분과 서평이 길어진 것이 그렇기 때문이었다고 핑계를 대본다. 아시겠지만 발췌한 부분은 백분의 일도 안된다. 1999년의 사회를 바라보고 충고한 글이 아직까지 유효한 것을 보며 홍세화의 지적 능력에 감탄해야 하는 것인지 정치사회현실이 한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했음을 개탄스러워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썩은 정치사회와 무관심한 개인들이 많아지니 배가 가라앉아 버렸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진실도 가라앉고 대한민국도 가라앉아 버렸다. 이제라도 깨어나야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