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 다니엘 튜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 다니엘 튜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다니엘 튜더 지음

우리는 객관적일 수 있을까요?
그렇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겠죠. 특히나 다른 부분도 아니고 우리가 우리나라를, 우리 역사를 바라볼 때 그렇기가 상당히 힘든 부분입니다. 이렇게 큼지막한 덩어리를 제외하고서 작고 사소한 자기 자신의 부분일지라도 사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어떨 때 보면 솔직히 아예 불가능하다고까지 생각되기도 하죠.

외국인이 우리를 알면 얼마나 알까요?
특히나 백인들은 동양인을 기본적으로 무시하면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어서 상당히 역겨운 감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동양은 동양 나름대로의 문화가 있는데 개발의 논리로만 바라보는 시각이 불편하기도 하고, 많은 가난한 나라들의 이유가 서양인인 그들의 제국주의적 침탈과 뒤로 수출하는 무기들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과연 다른 나라들을 무시할 자격이나 있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는 좀 다릅니다. 다니엘 튜더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에 방문했고, 그 뜨거운 열기와 열정에 한국이라는 나라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이곳저곳과 이것저것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듯 폭넓고 깊게 알아 갑니다. 그리고 그는 한국, 그리고 한국인의 모습과 이야기를 -차마 부끄러워 말 못하기도 했고, 요즘엔 종북으로 몰릴까 봐 입에 담지도 못할 이야기들도- 아무렇지 않게 끄집어 내기 시작합니다. 어떤 것은 저와 개인적으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잘못 알고 있거나 편협해 보이기도 해서 잡아 주고 싶기도 했습니다. 또한 말씀드렸듯이 약간은 어쩔 수 없는 외국인의 시각(잘 나가는 서양인의 시각)이 드러나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죠.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 다니엘 튜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 다니엘 튜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국인은 한국인인 제가 본 한국보다 한국에 대해서 더 정확하고 세밀하게, 폭넓게 사유하고 판단하며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한국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역사관은 아마 한국에선 존재하기 힘든 ‘중도’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과 과를 이렇게 바라볼 수 있는 한국인이 있을까 싶기도 했으니까요.

옮긴이의 말을 빌리자면 ‘외국인이 본 한국’이라는 느낌보다는 ‘우리가 본 한국’을 표현한 것 같다는 말씀에 동감합니다. ‘그’는 ‘한국’을 사랑해서 결국 ‘우리의 일부’가 되어 ‘한국’을 ‘우리’의 시각으로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원제인 “Korea : The Impossible Country”와 한국어 제목인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꽤 전체적인 내용을 잘 표현한 제목인 것 같습니다. 작가가 말했듯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는 외국인이 이 책을 잃고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국인들이 이 책을 잃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도 참사의 아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신 분들과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국민들이 많은 요즘입니다. 다니엘 튜더의 이 책이 나중에 나왔다면 이 엄청난 참사를 어떻게 분석했을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에겐 아프겠지만, 피해자의 부모가 “장례축제 희생물로 삼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는 그곳에 에너지와 분노를 승화하기보다는, 진짜 문제가 무엇이고 그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써 내려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순간에도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를 끊임없이 객관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상식적인 생각으로,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하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쓴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공중파를 비롯한 온갖 언론들의 플레이로 논점은 감정적인 방향으로 왜곡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만 해도 약과였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 가족들을 이기적인 집단으로, 개인 선택의 결과를 국가에게 미루는 파렴치한으로, 종북주의자들의 선동에 휘말리는 무지한 사람으로 몰아 갔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많은 책임을 그 배에 타고 있던 비정규직들이 떠 안게 만들었다.

생명을 다루는 업종에도 자본의 논리로 비정규직으로 메우고, 안전관리에 쓰는 돈 보다 로비에 썼던 돈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은 금방 잊혀지고 말았다. 경제의 논리로 굳이 수학 여행의 지침을 만들어 배로 여행을 가게 끔 만들었던 교육부의 이야기도, 배의 수명을 법으로 바꿔 가며 세계 최고 수준의 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 쓰다 버리는 배를 수입해다가 불법 증축해 가며 사용했던 이야기도, 그 불법을 감시하고 책임져야 할 권한을 불법을 저지르는 단체에 이양했었던 이야기도 잊혀졌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종북”딱지를 무제한으로 붙여 버렸고, 그 두려움에 많은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떠드는 사람들이라곤 무엇인가 정말 배후가 든든해 보이는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등의 누구의 어버인지, 누구의 엄마인지 알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시간이 2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아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우리 대한민국은 좀 더 안전한 사회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나마 조금 더 안전하다고 느껴진다면, 아이들의 부모가 찬 바닥에서 모진 시선을 받아 가며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들처럼 모질고 아프게 가지 말기를 기원했기때문이겠다. 그들의 행동하는 기도로 인해 부끄러운 내 자신의 몫까지 싸워주고 있기때문이겠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광화문에 올라 가야겠다.

-2016. 2. 19